273번 버스를 타고 출퇴근한다. 오늘 아침에도 어김없이 273번 버스를 탔다. 두 명이 앉는 좌석 안쪽 자리에 앉았다. 바로 앞엔 고등학생 또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 앉아 있었다. 스마트폰에 빨려 들어갈 기세였다. 청년이 창문을 양껏 열어두어서 뒷자리까지 거센 바람이 몰아쳤다. 뭐, 괜찮았다. 덜 마른 머리카락이 덕분에 빨리 마를 테니까. 문제는 버스 에어컨이 가동 중이었다는 거다. 청년이 활짝 열어둔 창문으로 귀한 에너지가, 몹쓸 CO2가 엄청난 속도로 휘발되는 게 보이는 듯했다. 그냥 아무 말 없이 (시크하게) 창문을 닫아버릴까, 아니면 청년에게 "죄송한데(공손), 지금 에어컨 나오니까 창문 좀 닫을게↘요↗(친절)"라고 양해를 구해야 할까, 아니면 "저기(어깨 톡톡), 에어컨 나오는데 창문 좀 닫아주시겠↘어요↗?"라고 요청해야 할까 - 고민하는 사이 버스는 대여섯 정거장을 지나쳤다. 옆자리에 할머니가 앉으셨다. 할머니는 앞 좌석의 활짝 열린 창문에서 들어오는 거센 바람이 싫으실 거야, 그래서 청년에게 "학생, 창문 좀 닫아줘"라고 하실 거야, 그러면 다 잘 될 거야(?), 하며 조마조마 기대했다. 할머니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다시 고민이 시작됐다. 간간이 버스 기사님을 원망하기도 했다. 기사님, 에어컨 트셨으면 창문 좀 닫아달라고 한 마디 해주시지 왜... 또는, 아직 에어컨 틀 정도로 덥진 않은데 벌써 왜... 하고 있는데 앞자리 청년이 벌떡 일어났다. 여전히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하차 벨을 누르고 버스 뒷문 앞에 섰다. 나는 잽싸게 팔을 뻗어 앞자리 활짝 열린 창문을 닫았다. 탁, 소리 나게 닫고 싶었는데 그러진 못했다. 대신 이렇게 힘을 주어 탁, 탁 소리를 내며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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